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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야 곤차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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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러시아 제국의 귀족으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아내이다. 1812년 탐보프 현에서 태어나 빼어난 미모로 주목받았으며, 1828년 푸시킨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 네 자녀를 낳았으나, 조르주 당테스와의 관계로 인해 푸시킨이 결투 끝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표트르 란스코이와 재혼하여 세 딸을 낳았으며, 186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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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야 곤차로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산드르 브률로프의 초상화, 1831년
알렉산드르 브률로프의 초상화, 1831년
본명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
출생1812년 9월 8일
출생지탐보프 현, 러시아 제국
사망1863년 11월 26일
배우자알렉산드르 푸시킨(1831년-1837년, 사별)
페트르 페트로비치 란스코이 (1844년)
자녀7명
묻힌 곳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이름
러시아어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Пу́шкина-Ланска́я
로마자 표기Nataliya Nikolayevna Pushkina-Lanskaya
결혼 전 성Гончаро́ва (Goncharova)

2. 유년 시절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1812년 9월 8일(구력 1812년 8월 27일) 러시아 제국 탐보프 현 카리안 마을(현재의 즈나멘스키 구, 탐보프주)에서 태어났다.[1][2] 당시 그녀의 가족은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자(조국 전쟁) 이곳으로 피난 와 있었다.[1][2]

아버지 니콜라이 아파나시에비치 곤차로프(Nikolai Afanasievich Goncharov)는 칼루가 출신의 제지업자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1815년에 정신 이상 판정을 받았다.[1] 이후 집안 살림은 어머니 나탈리야 이바노브나 자그랴즈스카야(Natalia Ivanovna Zagryazhskaya)가 도맡았다.[1] 그녀는 모스크바 귀족 사회와 연줄이 있는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1][2] 나탈리야의 조상 중에는 Euphrosine Ulrike von Liphart|에우프로시네 울리케 폰 리파트de와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агряжский|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자그랴즈스키ru가 있었다.[1]

나탈리야는 어린 시절부터 눈에 띄는 미모로 유명했으며, 이는 스웨덴 귀족 혈통을 가진 아버지 쪽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전해진다.[2]

3. 알렉산드르 푸시킨과의 결혼

1828년, 16세의 나탈리야는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러시아의 저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혔다.

푸시킨은 나탈리야의 아름다움에 반해 청혼했으나, 나탈리야는 여러 차례 망설였다. 그녀는 차르 정부가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푸시킨을 박해할 의사가 없다는 확신을 얻은 후에야 1830년 4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1830년 5월 6일에 정식으로 약혼하고 결혼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콜레라 유행과 같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결혼식은 1년 뒤로 미뤄졌다. 마침내 1831년 2월 18일(구력) 또는 3월 2일(신력)에 모스크바의 볼샤야 니키츠카야 거리에 있는 대승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6년 동안 나탈리야는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 마리아: 1832년 출생.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모델로 추정된다.
  • 알렉산드르: 1833년 출생.
  • 그리고리: 1835년 출생.
  • 나탈리야: 1836년 출생. 훗날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나사우의 니콜라우스 빌헬름과 결혼하여 메렌베르크 백작부인이 되었다.


푸시킨[2]이 주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시골 영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기간 동안 부부는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푸시킨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78통이 남아 있으며, 내용은 종종 가벼운 어조로 약간의 외설적인 표현을 담고 있지만 연애편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 나탈리야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쓴 한 통만이 남아 있다.

푸시킨은 아내에게 여러 편의 시를 헌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마돈나"(1830)가 있다.

4. 조르주 당테스와의 관계와 푸시킨의 죽음

1835년 나탈리야는 프랑스 출신 이민자였던 조르주 샤를 드 에케렌 당테스를 만났고, 이 만남은 사회적 음모와 염문설로 이어졌다.[3][4] 이 스캔들은 결국 1837년 1월 27일, 남편 푸시킨과 당테스 간의 결투로 비화되었다. 결투에서 푸시킨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약 35시간 후에 사망했다.

푸시킨의 죽음을 둘러싸고 나탈리야의 행동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안나 아흐마토바마리나 츠베타예바를 포함한 일부 비평가들은 그녀가 푸시킨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술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했으며,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을 위해 돈을 요구하여 푸시킨이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도록 내몰았다고 비판하며 푸시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3][4] 실제로 그녀는 임신 중에도 사교계 활동을 해야 했는데, 이는 여동생들이 남편감을 찾도록 돕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반면, 현대의 기록 보관 자료 연구나 그녀를 따뜻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가족 구성원들의 회고록 등은 보다 동정적인 시각을 제공한다.[5] 나탈리야는 푸시킨이 보낸 편지들을 소중히 보존했으며[6] (이는 그녀가 푸시킨의 문학적 유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훗날 이 편지들의 출판을 허락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사회적 관습 속에서 그녀의 선택이 불가피했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5. 표트르 란스코이와의 재혼

1843년, 나탈리야는 자신의 오빠와 같은 연대에서 복무하던 장교 표트르 란스코이(Пётр Петрович Ланской|표트르 표트로비치 란스코이ru, 1799–1877)를 만났다. 당시 여러 남성들이 나탈리야에게 구애했지만, 란스코이는 그녀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겠다는 약속으로 마음을 얻었다. 두 사람은 1844년 7월 16일 스트렐나에서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란스코이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유능한 군인이었으며, 결혼 전부터 뛰어난 경력을 쌓아왔다.[7] 결혼 후 나탈리야는 란스코이와의 사이에서 세 딸 알렉산드라(1845년 출생), 엘리자베타(1846년 출생), 소피아(1848년 출생)를 낳았다.

나탈리야는 1863년 11월 26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Ivan Aleksandrovich Zagryazhskij https://www.geni.com[...] 2023-01-06
[2] 서적 Rank and Style https://www.degruyte[...] Academic Studies Press 2012-02-01
[3] 간행물 Анна Ахматова. Разговор о Пушкине, Гончаровой, Дантесе https://www.youtube.[...] 2023-01-06
[4] 웹사이트 Мой Пушкин https://www.tsvetaye[...] 2023-01-06
[5] 웹사이트 Татьяна Рожнова - Жизнь после Пушкина. Наталья Николаевна и ее потомки только текст https://libking.ru/b[...] 2023-01-06
[6] 웹사이트 Письма к жене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fb2) читать онлайн {{!}} КулЛиб - Классная библиотека! Скачать книги бесплатно https://coollib.com/[...] 2023-01-06
[7] 웹사이트 Наталья Гончарова [Вадим Петрович Старк] (fb2) читать постранично {{!}} КулЛиб - Классная библиотека! Скачать книги бесплатно https://coollib.com/[...] 202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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